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1919년 1월 1일에 성립이 선언되었다. 처음 닷새 동안은 지금의 러시아 땅인 [[스몰렌스크]]에 수도를 두었지만 이후 [[민스크]]가 수도로 확정되었다. 1919년 시기의 벨로루시 SSR에 관해서는 [[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(1919)]] 문서를, 그리고 그 후신인 1919년~1920년간의 국가는 [[리투아니아-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]] 문서 참조. 1920년 리투아니아-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해체 이후 재수립되었다. 그러나 벨로루시 SSR의 영토는 1921년 [[리가 조약]]으로 비로소 확정되었다. 리가 조약에 따라 벨로루시는 폴란드와 볼셰비키에 분할되었고 볼셰비키가 점령한 지역이 벨로루시 SSR의 영토가 된다. 당시 벨로루시의 면적은 52,400㎢, 인구는 154만명으로 러시아 SFSR와 우크라이나 SSR에 비하면 소국이었다. 때문에 러시아 SFSR 산하 자치 공화국으로 격하될 위기까지 처했으나 [[레온 트로츠키]]와 연속혁명론의 지지자들은 리가 조약이 단순히 일시적 후퇴라 간주, 서부 벨라루스의 영토도 근시일 내에 병합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벨로루시 SSR의 유지를 주장했다. 따라서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대회에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[[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]]과 [[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]], [[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]]과 함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창설 조약을 승인하였다. 1922년과 1924년 두차례에 RSFSR은 벨로루시에 [[비쳅스크]] 주와 [[호멜]] 주의 벨라루스인 다수 영토를[* 기실 [[스몰렌스크]]를 비롯한 벨로루시 SSR의 강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러시아의 지역에 벨라루스인들이 다수를 점하는 지역들이 존재했고 이는 벨로루시 SSR이 초기에 영토 주장을 하던 지역이기도 하였으나 1920년대에 들어서 전략적 이유로 이 지역들의 인구조사는 조작되어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된다.] 양도하여 현 벨라루스-러시아 국경이 만들어졌고 당시 면적은 126,300㎢에 달했다. 다만, 영토는 늘어났지만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율은 농촌의 인구에 비해 매우 낮았다. 1925년 조사에 따르면 도시에 사는 벨라루스인 비율은 14.5%로, 15%조차도 채 되지않았다.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640px-Historical_map_of_Belarus_AD_1922.svg.png]] ▲ 소련 성립 당시(1922년)의 벨로루시의 영역이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다. 서쪽(녹색) 지역은 [[폴란드 제2공화국|폴란드]] 영토였다. 1939년 소련이 [[나치 독일]]과 [[독소 불가침조약|함께]] [[독소 폴란드 점령|폴란드를 갈라먹으면서]], 영역과 인구를 두 배 가량 넓히고 리가 조약에서 폴란드령으로 편입된 지역도 차지했다. 그러나 1945년 [[비아위스토크]] 부근 지역을 다시 [[폴란드 인민 공화국|폴란드]]에 돌려주면서 최종적으로 국경선을 확정지었다. 건국 초창기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이 거주하여 1924년부터 1938년까지 [[이디시어]]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었다. 특히 벨라루스에는 [[제2차 세계대전]]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 인구가 다수 거주하고 있어 [[폴란드인]]과 더불어 벨라루스 내 주요 소수민족이었다. 벨로루시 유대인 중 대표적인 인사로는 이스라엘 6, 7대 총리였던 [[메나헴 베긴]], 이츠하크 샤미르와 이스라엘 9대 대통령이었던 [[시몬 페레스]]가 있다.[* 그래서 벨라루스인들은 "벨라루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[[알략산드르 루카셴카|벨라루스의 지도자]]보다 더 많이 배출했다"고 농담하기도 한다.] 하지만 2차대전을 거치면서 80만명에서 9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 90%가 [[홀로코스트|학살]]당했고, 오늘날 벨라루스에는 약 13,000여명 정도로만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. 전후에 인구가 크게 증가하지 않은 편인데 이촌향도 현상때문이었다.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출산율 하락에도 도시 인구가 농촌인구를 역전하면서 1991년에는 인구가 1023만명으로 증가하였다. 1986년 [[체르노빌 원전 사고]] 당시 사고는 [[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|우크라이나]]에서 일어났지만, 바람에 의해 낙진이 이 나라로 떨어지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다. [[소련 해체|소련이 무너질 때]] [[발트 3국]], [[조지아]]를 제외한 다른 구소련 국가들과 [[독립국가연합]]을 창설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